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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명칭
전통사찰과 불상

태을암(太乙庵)
2016-11-21  이 태을암은 태안읍 동문리에 자리한 태안의 진산(鎭山)인 백화산 중턱에 건립되어 있는데. 창건연대(創建 年代)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리고 「태을암」이란 명칭은 국조(國祖)인 단군영정(檀君 影幀)을 안치(安置)시켰던 태일전(太一殿)에서 연유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이를 실증(實證)할 수 d있는 문헌이 없으니 신빙성이 희박하다. 태일전은 태안마애3불이 있는 위쪽 약 200미터 지점에 있었다고 전하나 건물은 이미 없어지고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또한 이 태을암의 대웅전(大雄殿)에 안치된 불상은 중앙에 석가여래(釋迦如來)·좌측에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우측에 석가여래(소형)를 배열해 놓았는데, 이는 석가삼존(釋迦三尊)의 형식도 아니고 또한 협시불(脇侍佛)로 석가여래를 배열해 놓은 것도 매우 이례적(異例的)인 보기 드문 일이다. 이 태을암은 지난 1962년 10월 1일에 전통사찰(傳統寺刹)제40호로 등록되어 현재 관리 중에 있다.


복성암(複成庵)
이 복성암은 태안읍 삭선리 6-34에 위치해 있는데, 창건 연대(創建年代)는 미상이다.
그러나 일설에 따르면 고려 말엽 (高麗末葉)에 창건되어 매우 번창 했었다고 한다. 한창 번창했을 때는 절구통이 무려 15개가 사용되었다고 하니, 좀 과장된 느낌이 없지는 않으나, 이는 단적(端的)으로 절의 규모가 웅대(雄大)하였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이렇게 웅대했던 복성암이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오면서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으로 인하여 사세(寺勢)가 점점 약화(弱化)되어, 마침내 폐사위기(廢寺危機)에 놓이게 되었는데,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1950년 6.25동란(動亂) 때 불타버리고 말았다.
그후 10여년 내려오다 지난 1961년에 다시 이곳에 초라한 초가집을 짓고 불사(佛事)를 시작하여 그 명맥을 이어오다, 1971년에 지금의 주지(住持)가 우람한 대웅전(大雄殿)을 신축(新築)하고 포교(布敎)에 최선을 다하니 사세(寺勢)가 번창하여, 현재 경향 각지(京鄕各地)에서 많은 불도(佛徒)들이 운집(雲集)하고 있다.
현재 복성암(福成庵)의 규모를 보면 대웅전과 요사(寮舍) 그리고 산신당(山神堂)으로 이루어졌는데, 대웅전에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측에 관음보살 우측에 대세지보살이 배열되어 있다.
이 불상(佛像)의 배열 실태를 보면 석가삼존(釋迦三尊)의 형식이 아닌 매우 이례적(異例的)인 배열 형식인데, 물론 각 사찰의 사정에 따라 다르겠지만 원칙으로는 석가여래(繹迦如來)를 안치하면 협시불(脇侍佛)로 좌우에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배열해 놓는 것이 합리적인 것이다.
(현재 전통사찰 등록을 신청 중에 있다.)


흥주사
이 흥주사는 태안읍 상옥리 1154에 위치하고 있는데,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상량문(上樑文)의 내용을 살펴볼 때, 대략 고려말렵(高麗末葉)으로 추정(推定)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 같다.
지난 1983년에 흥주사의 원통전(圓通殿)을 개축(改築)하기 위해 해체(解體)했을 때 상량보에서 상량문이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을 보면 가로55㎝,세로 81㎝크기의 창호지(窓戶紙)에 상량문이 쓰여져 있었으며, 그리고 끝(末尾)부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 내용에서 보는바와 같이 설립(設立)연대는 알 수 없으나 재중수(再重修)에서 오중창(五重創)까지는 햇수(年代)가 명기(明記)되어 있었다. 재중수가 영락19년(1421)에 실시되었고, 3중수가 강희29년(1690)에 이루어 졌으니, 재중수에서 3중수까지 무려 269년이 지났으며, 4중수가 도광11년 (1831)이니, 3중수에서 4중수까지 141년, 그리고 5중수가 대한 광무10년(1906)에 실시되었으므로, 4중수에서 5중수(重修)까지 75년이 걸린 셈이다.
또한 지난 1983년에 개축하였으므로 이를 제6중수로 본다면, 5중수에서 6중수까지 모두 562년이 되므로 이를 평균해 보면 약 112년 간격으로 한 번씩 중수한 셈이다.


태안 마애삼불(泰安磨崖三佛)
이 태안마애삼존불은 태안읍사무소 뒤에 우뚝 솟은 백화산(白畢山) 중턱에 세워진 태을암(太乙庵)의 동쪽 약 50m 지점에 자리하고 있는데, 지난 1966년 2월 28일 보물 제432호로 지정되어 관리되어 오다 2004년 8월 31일 국보 307호로 지정되었다.
이 태안마애삼존불은 거암(巨岩)의 자연석에 좌우로 여래입상(如來立像)과 중앙에 보살입상(菩薩立像)을 조각한 것인데, 그 크기는 여래상이 각각 255.240센티미터이고, 중앙의 보살상은 181쎈티미터이다.
이 마애삼존불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서 있노라면, 미소를 자아내며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또한 두 어깨에 걸쳐진 옷자락은 두팔에 걸쳐 평행호선(平行弧線)으로 길게 주름져 있는데, 그 첨단(尖端)이 3각형으로 변형된 것은 중국 6조(中國六朝) 양식의 수법과 매우 흡사한 것으로서 이는 고대(古代)에 흔히 사용된 것이다.
이같은 조각 양상으로 미루어 보아 이 마애삼존불의 조각 연대를 6새기 초엽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 마애삼존불은 우리 나라 석불상의 시초이며, 따라서 이 고장이 우리나라 불교 조상미술(佛敎彫像美術)의 선구 지역(先驅地域)이고, 백제 조상술(百濟彫像術)의 발상지임을 입증해 주고 있다. 또한 이 마애삼존불은 우리나라 석굴사원(石窟寺院) 경영의 최초 작품이기도 하다.
백제(百濟)의 조상술이 여기서 진일보(進一步) 발전하여 서산군 운산면(瑞山郡 雪山面)에서 아름다운 예술의 극치(極致)라고 일컫는 국보(國寶) 제84호로 지정된 서산마애3존불상(瑞山磨崖三尊佛像)을 이룩하여 놓고, 다시 내륙(內陸) 깊숙히 파급되어 갔다.


태국사(泰國寺)
이 태국사는 근흥면 정죽리의 안흥성내 성동산(城東山)에 자리하고 있는데, 창건연대( 創建 年代)는 미상(未詳)이다.
그러나 이 태국사의 창건을 둘러싼 여러 가지 설화(說話)가 전하여지고 있는데, 일설에 따르면 조선조(朝鮮朝)의 세종대왕(世宗大王)때 태안부사(泰安府使)의 꿈에 안흥항(安興港)의 바닷가에 상자(箱子)하나가 떠나려와 있으니, 즉시 이를 가져다 잘 처리하라는 내용이었다.
꿈에서 깬 부사는 반신반의(半信 半疑 )하면서 아침 일찍 바닷가로 내려가 주위를 살펴보니, 현몽(現夢)한 대로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금불상을 싼 보자기에는 기원 태평 국운(祈願 泰平 國運)이라 쓰여 있었다. 이를 보고 기이(奇異)하게 여긴 부사는 이 내용을 즉시 국왕(國王)께 상주(上奏)하니, 국왕께서 특명을 내려 승려(僧侶)를 현지에 파견케 하였다. 왕명(王命)을 받고 현지에 내려온 승려는 곧 터를 잡아 절을 세우고 명칭(寺名)을 보자기에 쓰여 있는 태평 국운에서 태(泰)와 국(國)자를 따라 태국사(泰國寺)라 명명하고 금불상을 안치(安置)하니 이것이 오늘의 태국사라는 것이다.
여하간 이 태국사는 다른 일반사찰(一般 寺刹)과는 틀리는 점이 있다. 서산군지(瑞山郡誌)에 따르면 「태국사는 국란이 있을 때 주승이 수막대장의 명을 받아 수군이 있는 18읍의 각 사찰의 승군을 지휘할 수 있는데, 이때의 군사상의 직권은 첨절제사와 같다」고 하였다.


몽산리 석가여래좌상(釋迦如來坐像)
이 석가여래좌상은 태안군 남면 몽산리(泰安郡南面夢山里)산 182번지에 자리하고 있는데, 정확한 조성(造成)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이 불상(佛像)의 생김새로 미루어 보아 대략 7세기 이후인 통일 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의 작품(作品)으로 보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다.
또한 불상의 형태는 결가부좌(結跏趺坐)에 항마인(隆魔印)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광배(光背)는 보주형(寶珠形)에다 화염문(火焰紋), 그리고 상부(上部)의 좌우에는 비천상(飛天像)이 조각되어 있다.
특히 광배와 연화좌(蓮花座)의 조각 기법(扶法)이 섬세함은 통일 신라시대의 수법(手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이 불상은 지난 1986년 11월 19일 충청남도 지정문화재 제122호로 지정되어 현재 태안군이 관리하고 있는데, 크기는 높이 103cm 어깨 폭 53cm 좌폭 83cm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