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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야기

명칭
전래문화

기우제
기우제란 가뭄이 심할 때에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는 제사를 말한다.
즉 하지(夏至)가 지나도록 비가 내리지 않아 모내기를 할 수 없고 또한 밭곡식이 말라서 비가 오기를 기원한 제사이다.
기우제는 정부나 혹은 고을과 각 마을 등 전국 각지에서 행해졌는데, 이 때의 제주(祭主)는 왕이나 지방관원 또는 마을의 장이 맡았던 것이다.
또한 불교계에서는 가뭄이 들었을 때에 용왕 운우경(龍王雲雨經)을 외면서 비내리기를 기원하는 법회를 열었으며, 그리고 고려조 때에는 가물 때에 수시로 기우 도량 (祈雨道場)을 열었다.
특히 고려 충목왕(忠穆王)은 몸소 내전에 기우도량을 베풀었던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이와 같이 옛날에는 가뭄이 들면 왕이 정치를 잘못하여 그 벌로 비가 내리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가물면 임금 스스로가 목욕 재계하고 정성드려 기우제를 지내야 했던 것이다.
지금도 각 지역에는 옛날에 기우제를 지내던 기우단(祈雨壇)의 유적이 남아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요즘은 각 지방에 거대한 댐이 조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지하수가 개발되어 있어 전천후 농사가 가능할 정도에 이르게 된 것이다.


동신제
동신제란 마을을 지켜준다는 수호신에게 지내는 일종의 제의(祭儀)행사를 말한다.
동신제는 마을 전체의 불행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고 따라서 풍년을 기원하는 뜻에서 마을 주민들이 합 동으로 거행하는 제의 형식인 것이다.
이같은 공동의식을 통하여 부락민의 공동체 의식(儀式)을 도모하고 아울러 단합을 꾀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각 지방에 따라 명칭은 다르지만 동신(洞神)을 모시고 제의를 거행하는 것은 다를 바가 없었다.
즉 산신당, 서낭당 등이 바로 그것인데, 우리 충남 지방에선 주로 산신당을 모시고 제의를 행한 것 같다.
물론 동신제는 마을 전체의 공동 이익을 꾀하는 제의였지만, 마을 주민이 함께 이를 주관한 것이 아니고, 주민 중에서 제관(祭官)을 선출하여 의식을 관장하였는데, 제관으로 선출된 사람은 부정(不淨)이 없어야 했다.
따라서 선출된 제관은 외출을 삼가고 아울러 제관의 집에는 외래인의 출 입을 막기 위해 최소한 보름 전에는 출입문 (대문) 앞에 황토를 3무더기 쌓아 놓고 문 위엔 금줄을 달아 출입을 통제하는 등 금기(禁忌)가 매우 까다로웠다.
그러나 제관은 물론 마을 주민이 모두 합심하여 금기를 지키고 부정한 일을 하지 말아야 하며 만약 멀리 여행을 하였다가 그곳에서 부정한 것을 보았으면 동신제가 끝나기 전에 집에 돌아오지 못하는 등의 금기를 엄격히 지켜야 했다.
왜냐하면 부정한 일이 있었는데 동신제를 지냈을 경우에는 신의 노여움을 사서 마을 전체에 큰 화가 미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신제를 거행하는 형식은 유가제의(儒家祭儀)와 당굿 형식이 있었는데, 이는 각 지방에 따라 달라졌으며 또한 절차 및 그 형식도 다소 차이가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요즘도 지역에 따라 동신제가 실시되어오고 있지만, 그 절차는 매우 간소화되어 변형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그 실례를 찾아보면 태안에서 정월 열 나흗날 밤에 남문리2구에서 지내는 노신제와 그리고 경이정(憬夷亭)에서 지내고 있는 중앙대제가 그것이다.
본래의 동신제와 오늘의 그것을 비교한다면 천양지차가 아닐 수 없다.
만약 오늘날 동신이 존재한다면 노여움을 사서 큰 화가 미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서기도 한다.


태안 중앙 대제
중앙 대제는 매년 음력 정월 열 나흗날 저녁에 태안 경이정에서 거행되는 제례를 말한다.
이 대제가 이 곳에서 거행되기 시작한 것은 23년 전인 1972년부터인데, 그 기원은 산신제에서 기인된 것이다.
백화산 중턱에 자리잡은 태을암과 마애불상이 있는 중간 지점인 차도 위 벼랑 밑 편편한 곳에 산신당을 짓고 매년 정월에 지성으로 산신제를 지내왔으나, 오랫동안 돌보지 않은 탓이었는지 산 신당의 퇴락으로 인하여 제례의식이 지난 1936년에 중단되었다가 그후 36년만에 다시 부활되어 오늘에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1972년 태안읍 내에 거주하던 남자 노인들이 중심이 되어서 숙의한 끝에 산신제를 다시 지내기 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옛날같이 산신당을 짓고 그 곳에서 산신제를 지내기로 한 것이 아 니라, 명칭도 중앙대제로 개칭하고 장소도 경이정에서 지내기로 합의하고, 당년부터 노인들이 제 물을 준비하는 등 모든 제의 절차를 주관하여 수년간 내려오다 젊은 사람들이 이를 인수받아 지 내고 있다.
즉 동, 남문리 이장들이 맡아서 주관하고 있다.
제의 절차를 살펴보면 경이정의 마루에 자리를 깔고 병풍을 친 다음 큰 상에 제물을 차려놓고 3헌과 독축으로 끝나는데, 초헌관은 읍장, 아헌 종헌은 각 기관장이 행한다.
그리고 모든 제물은 이장들이 준비하고 주관한다.
그러나 제례의식은 본래의 원형과는 많이 변형된 이른 바 현대식의 편리 위주로 변질된 느낌을 찾아볼 수 있다.


태안 노신제(泰安路神祭)
노신제는 태안읍 남문리 2구 회관 마당에서 매년 음력 정월 열 나흗날 저녁 이장을 비롯하여 부락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거행하고 있는데, 그 기원은 매우 오래된 것이다.
본래 태안읍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4방에서 거행하였는데, 동문리 1구는 샘골 입구의 여우 내 다리 앞, 동문리 2구는 태안 극장 입구 충청은행 앞, 남문리1구는 환동 입구 한밭 목욕탕 앞, 그리 고 남문리 2구는 태안 여자상업고등학교 입구인 브러크 공장 근처에서 각각 노신제를 거행하였으며, 따라서 제사 장소는 간이 시설로 매년 만들어서 사용하였다.
즉 4귀퉁이에 긴 말뚝을 박고 밀 짚방석으로 가린 다음 자리를 깔아 상을 차려놓고 제례를 거행하는데, 제물은 대략 주(酒), 과 (果), 포(脯), 채(採)를 비롯하여 시루떡을 통채로 놓고 이장이 주관하여 거행하였다.
이렇게 1948년까지 해방 후에도 계속해서 노신제를 지내왔으나, 정부 수립 후 미신 타파 운동 등으로 인하여 중단되고 말았다.
그 후 중단된 채 30여년 내려오다 지난 1980년부터 부활되어 거행하고 있는데, 지난날과 같이 동서남북의 4곳에서 지내는 것이 아니고, 남문리 2구만이 회관의 마당에서 거행하고 있다.
제례 장소는 옛날과 같이 3면을 밀짚방석으로 가리고 자리를 깐 다음 상을 놓고 제물을 진설하는데, 이 제물은 모두 이장이 책임지고 마련한다.
제례 절차는 3헌과 독축으로 끝나는데 초헌관은 마을의 영좌, 아헌관은 이장, 종헌관은 새마을 지도자가 행한다.
이들 제주(3헌관)는 노신제를 지내기 위해 10일간 집에서 근신하고 있다가 목욕재계한 다음 제례에 임한다.
근신이라고 하지만 옛날과 같이 외출도 금하고 육식도 삼가며, 부정한 짓도 보지 않고, 또한 행하지도 않는 엄격한 의미에서의 근신이 아니라 형식상의 근신인 것이다.


황도 당제(黃島堂祭)
황도당제란 본군의 안면읍 황도리에서 매년 음력으로 정월 초순에 거행되는 대동제를 말하는 것이다.
황도는 본래 섬이었는데 지난 1979년에 육지(창기리)와 연육교 (連陸橋)가 가설되어 지금은 섬으로서의 실감이 나지 않지만, 매년 당제가 거행되고 있으므로 이곳의 지명을 붙여 편의 상 '황도 당제'라 부르고 있다(실은 지명을 생략하고 당제라고 부르는 것이 예사이다).
이 황도리에는 큰 마을, 은거지, 집너머, 삶마곰 등 자연 부락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민가 약 100여호에 인구 50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 비교적 평화로운 마을이다.
그런데 이 황도리에서 거행되는 당제는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드믄 특이점이 있다.
즉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이 뱀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본래 당집 안에는 뱀의 그림 을 붙여놓고 이를 신봉했었는데, 지금으로부터 40여년 전에 마을의 일부 청년들이 미신 타파의 일환으로 이를 제거해 불태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뱀이 그려져 있는 부분은 타지 않고 오히려 선명하게 나타나 마치 생동감을 느끼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를 본 사람들은 모두 괴이하게 생각하고 즉시 땅 속에 묻어 주었다는 사실이 오늘에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 황도리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고 되었는지 그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나주 정씨와 해주 오씨가 최초로 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황도리에 정착하게 된 정씨와 오씨는 서로 자연부락을 중심으로 자기 씨족들이 한데 어울려 생활하면서 그 세력을 확산시켜 나갔던 것이다.
정씨는 큰 마을, 오씨는 은거지에 각각 당집을 짓고 매년 정초에 당제를 극진히 지내왔는데, 오씨 들의 가세가 점점 약화되어 마침내 그들의 당집이 허물어지고 말았다.
이 때 오씨들은 문중 회의를 열고 합의한 끝에 당집을 다시 세우지 않고 정씨들의 당집에서 함께 당제를 지내기로 하였던 것이다.
현존하는 당집이 그동안 몇차례 중수는 하였지만 근원은 정씨들의 당집이 되는 것이다.
이 당 집은 당산에 조영되었는데, 3,4평에 불과한 목조건물과 두평 미만의 초라한 산신당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당집의 주위에는 수령(樹齡) 수 십년을 자랑하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하늘을 찌르고 있어, 이 당집의 역사를 실증해 주고 있다.
지금도 매년 정초에 이 당제가 거행되고 있으며, 그 순서는 다음과 같다.
당제를 주관하는 제주를 달리 당주라 부르고 또 이 당주를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을 화주라 하는데, 이들은 주민들이 선출하는 것이다.
즉 당주는 음력 섣달 보름에 당제 준비를 위해 열리는 대동계에서 선출한다.
그러나 이 당주는 아무나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당주 자격이 있는 사람을 뽑아야 한다.
일단 선출된 당주는 여러 가지 금기사항을 철저히 지켜야 하는 것이다.
만약 금기 사항을 지키지 않고 부정한 자가 당주가 되어 이 당제를 주관하였을 때, 당주는 물론 마을 주민들이 모두 신령의 화를 입어 불행해진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주는 이 금기 사항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다.
특히 당주는 당제를 무사히 끝낸 뒤에도 다음해의 당주가 선정되기 전에는 역시 금기를 철저히 지켜야 하는 것이 이 황도 당제의 특징이기도 하다.
당제를 마친 당주가 1년동안 온갖 부정한 것을 보아서도 안되며 또한 행하여도 안됨은 물론, 심지어 자기 집의 제사에도 참여할 수 없는 것이다.


객귀풀이
객귀란 글자 그대로 객지에서 죽은 사람의 혼령을 말하는 것인데, 외출하였다고 돌아와서 병에 걸렸다든가, 또는 다른 집에서 들어온 음식물을 먹고 갑자기 병이 났을 때 농촌에서는 흔히 객귀 들렸다 하여 이를 쫓아내는 것이다.
객귀 쫓는 것을 객귀물린다고 하는데, 이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을에서 다년간 경험이 있거나 아니면 판수가 주로 실시한다.
병자측의 부름을 받고 달려간 판수는 병자의 상태를 살펴본 다음, 객귀를 쫓아내기 위해 즉시 된장국(토장국)을 끓이게 하여 이를 바가지에 담아가지고 병자의 입에 갖다 대며 침을 3번 뱉게 한다.
이 때 판수는 병자의 머리카락을 부엌칼로 3번씩 조금씩 잘라 바가지에 넣어가지고 밖으로 나오면서 재빨리 방문을 닫고 칼로 문살을 득득 엑스(X)자형으로 긁은 다음, 방문에 소금을 뿌리고 마당에 나와 된장국을 버리는데, 이때 주문(呪文)을 외고 바가지는 자기 발 앞에 엎어 놓으며 칼 끝으로 땅바닥을 약 1m 가량 가로고 긋고서 10여보 앞으로 칼을 던지어 땅바닥에 꽂히게 한다.
이 때 꽂힌 칼날이 집안 쪽으로 향해 있으면 칼을 빼내어 처음부터 되풀이해야 한다.
왜냐하면 칼날이 집안으로 향해 있으면 아직 병자에게 붙어있는 귀신(객귀)이 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이는 너무나 미신적인 행위인 것 같지만 이같이 객귀풀이를 하면 병자가 낳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요즈음은 이같은 습속도 없어졌지만, 병이 나면 즉시 병원으로 달려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기 때문이다.


굿
굿이란 무당이 노래와 춤을 추며 신에게 치성드리는 의식의 하나이다.
즉 초복(招福), 제액(除厄), 안택(安宅), 요병(療病), 진령(鎭靈), 초혼(招魂), 기우(祈雨), 축귀(逐 鬼) 등을 목적으로 무당이 중심이 되어 실시하는 노래, 춤, 의식 일체를 지칭하는 것이다.
굿은 시종 노래와 춤을 위주로 진행되는데 이때의 춤은 도무(跳舞)이며 노래는 신가 (神歌)를 부르는데, 처음은 두 박자인 '덩덩'으로부터 시작하여 '덩덕궁'의 세 박자 음율로 연속되다가, 절정에 이르면 다시 다섯 박자인 '덩덩 덩덕궁'의 음율로 반복되면서 굿은 계속된다.
그런데 굿은 대략 4단계의 과정으로 이루어지는데, 제1단계는 무격(巫覡)이 신령을 초청하는 것이다.
초청한 신령이 강림(降臨)하면, 무격은 이름을 부르며 반갑게 인사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이때의 이야기는 신령들에게 제주의 청을 알리는 일종의 대담이 되는 것이다.
이 대담에 이어 제2단 계로 들어가는데, 이 때는 도무(跳舞)와 함께 지나칠 정도의 행동과 소리를 크게 지르면서 진행되는데, 굿의 목적이 병자를 치유하는데 있다면, 신령에게 병의 근원을 물어 이 중에서 가장 권위있는 신령에게 치유를 부탁하며 제3단계로 들어간다.
여기서는 무격들이 장구를 치고 방울을 흔들며 또한 무악으로 환자에게 주술적인 행동을 하면 서, 병귀(病鬼)에게 음식물을 주어 이를 먹고 나가라는 것이다.
즉 축귀(逐鬼)하는 시늉을 한다.
이것으로 병자의 치유가 끝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제4단계에 들어가는데, 여기서는 병자 치유의 목적으로 초청했던 신령들을 다시 왔던 곳으로 돌려보내는 마무리의 절차로서 굿이 끝나는 것이다.
그러나 굿은 이 4단계의 과 정에서 거리의 행사가 있게 되는데, 대략 12 내지 14거리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지만, 이것도 역 시 무격과 지역에 따라 일정치 않다.
참고로 12거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부정, 가망청배, 젠적, 불사, 조상, 상산, 별상, 대감, 제석, 오귀, 군웅, 창부 등이다.
그리고 굿은 대개 씨끔굿(일명 우구굿), 안택굿, 별신굿 등이 있다.
요즈음도 굿이 간간히 행하여지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그 원형과는 거리가 먼 매우 변형되고 또한 간소화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현대적 감각에서 이 굿을 본다면 다분히 원시적이요 비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이런 논리적인 거론 이전에 굿은 우리 민족의 토속 종교의 하나로 그 토대를 굳혀오면서 민족의 생활을 지배하여 온 정신적인 힘의 근원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산신제
집터를 지키는 터주신이 있고, 집을 지키는 성주가 있는가 하면, 부엌을 지키는 조왕신이 있듯 이 산에는 역시 산을 지키는 산신이 있었다.
이 산신의 모습은 흔히 신선이나 호랑이 상으로 나타냈는데, 산소를 쓰거나 산소에 제사를 지 내거나 혹은 산을 다룰 때는 반드시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야 했으니 이를 산신제라 일컬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산신제의 내력을 살펴보면 매우 오래 되었음을 알 수 있으니, 즉 신라는 이미 3산5악에 그리고 고려는 송악산과 남산들에 춘추로 산신제를 지냈는데, 이 유풍은 다음의 조선조로 이어져 내려와 국가의 태평을 비는 산신제를 지냈던 것이다.
지금도 이 습속이 남아있어 신을 다룰 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산신제를 지내고 있는 것 같다.


삼신제(三神祭)
삼신이란 아기의 점지와 산모, 그리고 생아를 맡아보며 수호한다는 3신령을 말하는 것인데, 이 기를 낳으면 3일이 되는 날 땅바닥에 짚을 깔로 그 위에 밥 세그릇과, 미역국 세 그릇을 차려놓고 삼신할머니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이와같이 삼신제를 지내는 것은 어린 아기의 건강과 장수를 바라는 것이다.
또한 어린 아기가 병에 걸렸을 때나 산모가 젖이 잘 나오지 않을 때도 삼신할머니에게 밥을 해 놓고, 병이 낫고 젖이 잘 나오도록 하여 달라고 삼신제를 지냈는데, 요즈음은 이같은 습속이 거의 사라진 것 같다.


서낭제(成隍祭)
서낭제란 서낭신에게 지내는 제사를 말함인데, 이 서낭신은 한 마을의 수호신(守護神) 으로 받드는 신이다.
서낭은 대개 마을 입고 산마루에 있는데, 마을에서 공동으로 서낭제를 지내는가 하면, 또는 개인의 구복(救福)을 위해 지내기도 하였다.
서낭제 때 떡시루를 비롯하여 포(脯), 채 등을 갖추어 놓고, 또한 색깔의 헝겊을 오려서 울긋 불긋하게 나무가지에 묶어 놓는다.
새벽 일찍 나들이를 떠나다 서낭제 떡을 발견하면 먹는 수도 있으나, 이땐 다 먹는 것이 아니 고 일부만 먹는데, 이 떡은 집에 가져오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먹지 않고 그대로 지나쳐버리는 경우가 많다.
서낭 앞을 지날 때에는 반드시 돌을 3개 주어서 서낭에 던지고 침을 3번 뱉어야 한다는 풍속이 극히 최근에까지 내려왔으나, 요즈음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서낭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돌을 던져 놓았기 때문에 마치 무덤같이 되었는가 하면 나무가 우거지고 또한 나무가지에는 5색 의 헝겊이 매달려 있어 우중충하고 보이므로 밤엔 이곳을 지나가는 뭇사람들이 매우 꺼려하고 있었다.
필자도 소년 시절에 이같은 경험을 한 적이 없다.
지금은 사회적인 발전과 도로확장 등으로 인하여 이같은 서낭당이 대부분 없어진지 오래 되었고, 또한 이런 사실을 믿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용왕제(龍王祭)
땅에는 지신(地神)이 있듯이 바다에는 해신(海神)이 있어 바다에서 일어나는 인간 관계의 모든 화복을 관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았다.
특히 우리 태안은 반도이므로 3면이 바다에 접해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생활터전이 바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어민들은 해신을 유력한 신으로 숭배하 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선박에 의한 고기잡이를 비롯하여 그물(그무질), 사둘진(사두질), 살 (漁箭), 돌살 (독살) 등을 이용한 어로(漁撈), 썰물 때 바다에 나가 미역과 우뭇가사리 등등 각종 해조류(海藻類)를 채취하고 또한 낙지, 게, 조개, 고동 등 실로 다양한 해산물을 수확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난날의 농어민에게는 바다가 생활 터전의 전부라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였으니, 그들이 바다를 소중히 여겼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와같이 어촌에서는 어로작업의 안전과 개인의 구복을 위해 연초에 지성으로 용왕제를 지냈던 것이다.
지금은 이같은 풍속도 거의 사라진 것 같으나, 배를 가지고 있는 가정에서는 지금도 출어(出漁) 전에 뱃고사는 지내고 있는 것 같다.


장승제(長丞祭)
이 장승은 긴 통나무에 사람의 얼굴을 기이(奇異)하게 새겨서 붉게 칠하였는데, 하나는 천하대 장군(天下大將軍), 또 다른 하나는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이란 글씨를 파서 마을 입구에 세운 것이다.
이는 마을이나 성(城)을 수호하는 신이라 하여 매년 정월 대보름날에 마을에서 제사를 지내니 이를 장승제라 불렀던 것이다.
이렇게 장승제를 재내는 것은 악성전염병을 예방하는 동시에 모든 재난으로부터 마을을 지키는데 그 뜻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 장승은 거리를 표시하는 이 정표(里程標)의 역할도 하였던 것이다.
즉 장승을 10리나 5리의 간격으로 세워두어 길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기도 했다.
지금도 각 지역에는 옛날의 장승이 버티고 서 있음을 간간히 볼 수 있는가 하면 민속의 하나로 서 이를 다시 복제하여 새롭게 세우고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고사(告祀)
고사란 개인을 비롯하여 온 집안이 재액(災厄)을 당하지 않고 행운이 계속되도록 신령에게 기원하는 일종의 제사를 말한다.
이 고사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풍속의 하나로서 지금까지 전래되어 오고 있는 것이다.
본래 고 사는 가을철에 주로 지냈으며, 또한 고사를 지내기 위해서는 미리 몸가짐을 깨끗이 하고 부정한 일을 보아서는 안되며, 경건한 마음으로 근신해야 한다.
따라서 대문 밖에는 대접 크기의 황토 3무더기를 만들어 놓거나, 또는 문 위에 금줄을 달아 외래인의 출입을 금지시킨다.
이렇게 한 다음 고사를 지내는데, 고사에는 시루떡을 비롯하여 채, 과 일, 정화수 등을 차려놓고 조상신, 터주신, 성주신, 조왕신, 삼신 등에게 제를 올린다.
고사는 무당이나 판수를 불러 지내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가정주부가 중심이 되어 실시하지 만 옥외에서의 고사에는 남자가 관장하였다.
요즘도 고사의 명맥은 이어져 내려오고 있지만, 실시 방법은 매우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 금은 앞에서 말한 전통적인 가정 내에서의 고사보다는 사업장에서의 고사가 수시로 행하여 지고 있는 것 같다.
즉 공장 운영이 잘 안되면 공장에서, 새차를 구입했으면 차 앞에서, 선박을 가진 사람은 선박 등에서 고사를 지내며, 회사의 번영과 무사고를 마음 속으로 비는 것이다.
그리고 요즘의 고사에는 꼭 돼지머리가 오르는 것이 특징이다.


성주제
성주란 집을 지켜준다는 신령을 말함인데, 집을 새로 짓거나 또는 이사를 하였을 때는 반드시 판수나 무당을 불러 떡시루를 해다놓고 기원한 뒤에 백지(窓戶紙) 속에 동전을 넣고 동그랗게 접 어서 방이나 대청의 대들보에 붙이고 이를 받드는 것이다.
특히 가을 추수가 끝나면 성주 앞에 시루떡을 해다 놓고 기원하는 풍습이 우리들의 생활 속에 오랫동안 젖어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이와같은 풍속도 우리들의 주변에서 사라져간지 이미 오래 된 것 같다.


횡수막이
이 횡수(橫手)란 말은 글자 그대로 뜻밖의 운수(뜻하지 않은 운수)란 뜻이요, 또한 막이란 막는다는 말로서 횡수막이는 뜻밖에 닥쳐오는 재액을 막는다는 뜻이다.
즉 당해의 횡액을 막으려고 정월달에 무당이나 판수를 불러 실시하는 일종의 굿을 횡수막이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횡수막이를 우리 시골에서는 흔히 '홍수매기'라고 부르는데 이의 어원(語原)은 어디 까지나 '횡수막이'가 옳은 것이다.
즉 홍수매기란 횡수막이의 와음(訛音)인 것이다.
그러나 횡수막이란 원어(原語) 보다는 오히려 와음인 홍수매기를 많이 쓰고 있는 것은, 오랫동안 민간인 사이에서 전래되어 오면서 굳어져버렸기 때문에 편의상 그디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횡수막이의 방법은 가족 중에 당년에 횡수가 있는 사람이 있으면, 이 횡수를 미리 막기 위해 무 당을 불러 실시한다.
이 때는 쌀 3되 3홉에 팥을 넣어 떡을 찌는데 3겹으로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소창지 3자 3치, 짚세기 3켤레, 돈 3냥을 준비하여 가지고 비교적 사람의 왕래가 많은 네 거리에 가서 십자형으로 짚을 깔아놓고 그 위에 떡시루를 올려 놓는다.
따라서 준비한 돈과 신발, 채, 실 등을 옆에 놓고 상 위에 촛불을 켜놓은 다음 무당이 북과 양 판을 치면서 주문(呪文)을 왼다.
이때 당년의 액운이 있는 사람이 저고리 동정을 떼어서 불에 태 우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한 해 동안 아무런 재액을 당하지 않고 무사히 보낼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횡수막이는 각 지역에 따라 실시하는 방법이 다르다.
어느 지역에서는 백설기, 채, 술, 신 한 켤레, 동정 한 개와 촛불을 켜놓고 실시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쌀 3되 3홉, 팥을 넣은 3겹의 떡, 소창지 3자 3치, 신발 3켤레, 돈 3냥 등 모두 삼자가 들어가는데 이 삼(三)이란 한자어에는 끝낸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즉 횡수막이를 실시하여 재액을 빨리 끝낸다는 것이다.
또한 붉은 팥은 벽사(酸邪)의 뜻이 있는 것이다.
지금은 이같은 습속들도 우리들의 생활 주변에서 사라진지 이미 오래된 것 같다.


조왕단지
조왕( 王)이란 부엌을 맡은 신을 말함인데, 고대의 미개인들이 믿던 다신교(多神敎)의 습속으로 내려온 것인지는 몰라도, 우리들의 주변에는 많은 신이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즉 우리들이 살고 있는 집터를 지켜주는 '터주신'이 있고, 또 집을 지키는 '성주'가 있는가 하면 부엌을 지키는 조왕신이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부엌에는 조왕신의 상징으로 '조왕단지'를 갖추어 놓고 1년 동안 비우지 않고 계속 물을 채워 두는 것이다.
그런데 각 가정에 따라 다르다.
즉 매일 아침 새로운 물로 갈아 놓는 집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아예 조왕단을 만들어 놓은 가정도 있었다.


고수레
고수레란 판수나 무당이 굿을 할 때 또는 산에나 들에서 음식을 먹을 때, 그리고 남의 집에서 음식이 들어왔을 때, 그대로 먹는 것이 아니라 우선 귀신에게 바친다 하여, 음식을 조금씩 떼어 멀리 던지면서 외치는 소리인데, 지역에 따라 그 명칭이 다름을 볼 수 있다.
즉 고시레, 고시내, 고씨내 등등 여러 가지로 불리워지고 있다.
이같이 여러 가지 명칭이 있듯이, 따라서 그 어원의 유래가 다른데, 그 중 하나의 실례를 들어 보면, 일찍 단군조선(檀君朝鮮) 때에 고시(高矢)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백성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주었으므로, 그 은혜를 보답하는 뜻에서 음식을 먹기 전에 반드시 고시에 대한 예(禮)로 서 음식을 떼어 던지면서 '고시례'하고 먹는 습관이 생긴 것이라 한다.
또한 조선시대의 호남지방에 고씨라는 후덕한 지주가 있었는데, 소작인의 어려운 실정을 감안 하여 소작료를 감하여 주는 등 후대하였으므로 그 후 농민들이 음식을 먹을 때에는 고씨에 대한 고마은 뜻으로 먼저 음식물을 떼어 '고씨레'하고 던졌다는 것이다.
이같은 설(設)들이 있으나 본래는 전자의 고시례였는데, 오랫동안 내려오면서 '고수례'로 굳어져 우리말로 변한 것이라고 한다.
또 일설에 따르면 외부에서 들어오는 음식물에는 잡귀가 붙어 있으므로 먹기 전에 일부를 떼어 버림으로서 이 잡귀를 쫓았다는 데서 유래된 것이라고도 전한다.
지금도 이같은 습속이 일부 지역에 남아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안택
안택이란 글자 그대로 집안의 평안함을 기원하는 일종의 제의(祭儀)형식인 것이다.
즉 안택은 주로 판수나 무당이 안택경(安宅經)을 외며 집안에 탈이 없도록 터주신을 비롯하여 성주신 조왕 신 등을 위로 제사하는 것이다.
이 안택은 가을 추수가 끝난 뒤에도 실시하는 경우가 있으나, 대부분 정초에 많이 실시한다.
이는 하루라도 속히 무사함을 기원하는데 그 목적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안택은 새해를 맞이하여 당년의 무사태평을 비는 만큼 정성껏 거행해야 하며, 따라서 부정을 피해야 하므로 외래인의 출입을 통제하였다.
즉 대문밖에 황토 세 무더기를 쌓아놓고 문 위엔 금줄을 쳐서 출입을 막았다.
안 택은 가정주부가 비손으로 실시하는 것과, 판수나 무당을 불러 행하는 두 가지가 있었는데, 우리 지방에서는 주로 판수에게 맡겨서 실시한 예가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요즈음은 이 같은 민속도 거의 사라진 것 같다.